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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친일파 공덕비, 그리고 단죄비

by 연쇄먹방범 2020.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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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공덕비

 

 

공덕비(功德碑)는 공을 기리기 위하여 그 행적을 새겨 세운 비석이다.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거나 유적지 등을 다니다 보면 서원, 옛 지방관아(현 군청이나 시청)나 향교 인근에 공적비가 세워진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간혹 공덕비를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그 이유인즉슨 친일파의 공덕비가 떡 하니 세워져 있어서다. 실제로 일제시대 때 친일파 상당수는 애국을 한 것처럼 포장돼 공덕비가 세워진 경우가 많다.

 

 

가령 지금의 인천시장이라 할 수 있는 조선 말기 인천부사를 지낸 '을사오적' 박제순(1858~1916)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1905년 외부대신으로서 이완용과 함께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또 구한말에는 공주 우금치에서 2만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학살하기도 했다. 외부대신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고 내각의 수장에 올라 일본의 귀족 작위까지 받은 대표적인 친일파 중에 한 사람이다.

 

 

ⓒ (우측사진) SBS 뉴스

 

 

박제순은 1888년 5월부터 1890년 9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인천부사를 지냈다. 이후 1891년 8월 인천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마을 주민들이 관행처럼 전직 부사의 공덕비를 마을 입구나 고개에 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옛 인천도호부관아가 있던 인천 문학동, 관교동 일대에는 과거 부사들의 공덕비가 모두 18개 있는데 여기에 바로 박제순의 비석도 포함돼 있다.

 

 

그의 비석에는 동학농민을 비적으로 표현했는데 “박제순이 비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구하니 편안해졌다”는 다소 어이가 없고 낯 뜨거운 공적이 4련시로 기록돼 있다.

 

 

이 비석은 해방 60주년이던 2005년 친일파에 대한 기념 논란이 일어 공덕비가 철거됐다. 독립운동 100주년이던 지난 2019년 박제순의 공덕비가 어디에 있는지 추적했고, 인천향교 옆에 있는 인천도호부관아 재현 건물 담벼락 아래 방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부직포에 덮이고 밧줄에 묶인 채 담벼락 아래 있었지만, 건물을 관리하는 인천시조차도 박제순 공덕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박제순 외, 세계유산 공산성 앞에도 충청관찰사였던 박중양, 김관현의 공적비가 나란히 서 있다. “학교를 세우고 잠업을 키웠다”는 내용의 비석인데 실상은 모두 중추원 참의로서 조선인의 징병을 독려하는 등 친일 행각을 벌인 사람들이다.

 

 

정선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정선아라리촌’에도 친일파의 공적비가 서 있다. 정선아라리촌에 있는 문제의 공적비는 친일파 이범익(창씨명 淸原範益, 1883~?)의 것이다. 이범익은 일제 때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서 거물 친일파로 불린 사람이다.

 

 

ⓒ 서울의 뉴스, 오마이뉴스

 

 

이 공적비의 경우 이범익이 강원도지사 재직 당시 그의 휘하에 있던 정선군수 김택림이 1932년에 세운 것이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정선군청 내 마당에 세워져 있다 군청 건물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정선읍내 비석거리가 있던 우전거리로 이전되었다. 그 후 정선 남산 밑, 비봉산 입구 등으로 전전하다가 2008년 정선아라리촌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은 정선의 충신 윤칠봉의 추모비 등 10여 기와 함께 서 있는데 그 가운데 크기도 가장 컸으며 비석의 재질도 최상급이다. 그의 비석에는 “우리 백성 편의하니 이로부터 넉넉하고 풍성해져 많은 사람 칭찬하니 두터운 은혜 영원히 칭송하네”라는 글이 적혀있다.

 

 

또한 충북 음성향교 입구에 세워진 친일파 이해용의 공덕비도 있다. 이해용은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완용과 6촌 관계다. 6촌답게 그의 친일 클래스도 남다른데 급기야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해용은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조사과 서기로 근무하다 1918년 일제의 경찰이 됐다. 이후 지금의 경찰서장급에 해당하는 경기도 강화경찰서 경부를 거쳐 행정관료로 전환, 음성군수·청주군수 등을 지내며 일제에 협력했다. 1940년 4월에는 중일 전쟁에 협력,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처럼 친일파의 공덕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존재하고 있다.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런 자를 칭송하는 비석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에도 버젓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친일파의 공덕비는 현재는 철거가 된 경우도 있지만 아직까지 당당히 세워져 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해 공덕비 철거는 현재진행형이다.


● 공덕비 철거만이 능사는 아니다

 

친일파 공덕비는 친일행적이 있는 이들을 칭송하여 세운 비석으로, 잘못된 역사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친일파의 비석은 곳곳에 산재해 있어 친일행적을 밝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공덕비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가령 박제순의 공덕비도 철거돼 담벼락에 방치되어 있었다. 철거는 했지만 처리의 어려움이 있었다. 철거 후 담벼락 아래 그대로 방치돼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 지역사회와 역사 학계에서는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담벼락 아래 그냥 둘 수는 없다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없어서였다.

 

 

일부는 원래 자리로 옮겨놔야 한다고 했고, 인천시립박물관 등 제3의 장소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었다. 담벼락으로 옮겨놓은 것도 역사의 한 과정이니 그 자리에 두되, 친일파 박제순의 공덕비임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우자는 의견도 제시됐었다. 또 박제순의 공덕비를 밟고 다닐 수 있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바닥에 눕히고 발판으로 써 친일파를 단죄하자는 의도였으며 아예 부수어 버려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인천시는 이런 의견 수렴을 거쳐 최종적으로 원래 자리인 비석군으로 옮겨 놓되, 별도의 공간에 눕혀 놓기로 했다. 그리고 '단죄문'이 적힌 안내판을 만들어 이 비석의 주인이 누구이고, 왜 눕혀 있는지를 알리기로 했다. 바로 죄상비(단죄비)다.

 

 

ⓒ TJB뉴스, 충북인뉴스

 

 

 

친일파의 공덕비를 철거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다만 철거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오히려 치욕의 역사를 길이 남겨 후세에 역사 교훈의 증거자료로 삼는 것도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친일파가 세운 친일파 공적비를 오욕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사교육의 산 자료로 활용하자는 의견이다. 그 앞에 죄상비(단죄비)를 세워 더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행적을 알리는, 이른바 살아있는 역사 교재로 활용하며 과거 비석의 주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기억하자는 의미다.

 

 

최근 공주시는 친일파의 공덕비 앞에 이들의 실체를 담은 죄상비를 차례로 설치하고 있다. 정선에 있는 이범익의 공적비에도 수차례 죄상비를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끝내 단죄비가 세워졌다. 이범익의 친일행적은 물론 제작 당시 정선군수 김태림의 친일행적, 비석 해석문, 죄상비 설립 동기 등에 관한 설명이 들어갔다.

 

 

친일 행적을 포장해 공덕비를 세워 진실을 가렸지만, 진실은 결코 가려질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여전히 친일 행적이 명확한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송덕비나 공덕비가 설치돼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이렇게 죄상비를 설치해서 이들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죄상비는 그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낱낱이 알리기 위한 증거이자 역사교육의 산 자료로 길이 활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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